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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에게

sa_nic 2017. 11. 22. 14:25





  결에게

 

네가 보내온 쪽지들은 잘 받았어. 사람들은 그걸 첫눈이라고 불러.

작년에 너는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마지막으로 속삭였지. 얼음바늘로 내 온몸에 구멍을 뚫어놓고서 말이야. 돌아오는 계절들로 몸을 메워두지 않으면 그때는 더욱 두껍고 질긴 바람을 가져와 내 구멍 하나하나에 집어넣어 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지경으로 무너뜨리겠다고. 얇은 목련 잎에, 녹색 파도에, 금빛 달에 눈물만 눌러 담아 너에게 보낼 때면 언제나 두 손의 핏기가 하얗게 가시곤 했어. 그 떨림을 읽었니.

보드라운 첫눈을 맞아보니 네가 우리의 재회를 위해 얼마나 아프게 이빨을 벼려두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어. 곱게 갈린 눈송이에서 여전히 차가운 너의 웃음소리가 느껴졌어. , 너는 나만을 위해서 그토록 공들여 첨리해지는 거니. 나만을 위해서 너는 그토록 앙상해지는 거니. 매년 키가 자라나는 거니. 아무리 외로워도 너의 연인이 되기는 싫었는데. 피부에 닿자마자 녹아버릴 정도로 연약한 눈송이 한 조각에 모든 실핏줄들이 재빠르게 떨려왔어. 이 광기를 읽었니. 이제 매일 아침의 유리창 밖에는 차가운 서리가 깔려 있어. 그런 풍경을 보면 두 눈은 그대로 힘없는 눈덩이가 되어 흘러내릴 것만 같아.

, 나는 가장 하얗게 붕괴할 준비를 마쳐가고 있으며 가장 하얗게 미칠 생각에 벌써부터 멋진 춤 동작들을 이것저것 연습해보고 있어.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에 이렇게 적은 글을 너에게 굳이 부칠 생각은 없어. , 너는 흰 서리 위로 내리던 백금빛 아침햇살을 보았니. 서리를 녹이기 위해서, 그 어떤 이야기 속 영웅보다도 극적으로 서리던 한 자락의 온기를 짐작해보았니. 나는 이 글을 아침햇살 곁에 몰래 놓아둘 거야. 내가 잘게 부서져버린 다음에 어떤 빛이 이 글을 읽고 네가 얼마나 혹독한 소년인지 알게 되도록. 너를 체포해서 가장 깊은 지옥으로 데려가 줄 수 있게. , 나의 아름다운 소년아,  가장 하얗게 쓰러질 준비를 마쳐간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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